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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문자추상' 남관 (1911~1990)아트 컬렉터를 위한 작가소개/대가_작고, 원로작가 2022. 3. 16. 09:07728x90반응형
"문자추상"
남관은 1911년 경북 청송의 구천리라는 시골에서 태어났다. 촌장을 지낸 아버지를 둔 3남매 중 맏아들이었다. 청송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열다섯 그에게 남관의 재능을 알아본 일본인 교장이 "그림을 잘그리니 소질을 살려 더 공부해 보라"했고, 그의 추천서를 들고 도쿄로 향했다. 1년 준비 후 와세다중학교에 입학했고, 졸업 후 다이헤이요미술학교에 들어갔다. 1935년에 졸업한 뒤 10년 더 일본에서 미술 공부를 하며 공모전에서 수상하는 등 화가로서 자리를 잡는다.
일본의 패전 소식을 들은 남관은 즉시 귀국했다. 첫 개인전은 1947년 지금의 신세계백화점 자리의 동화백화점 화랑에서 열었고, 화단의 호평을 받았다. 당시 화풍은 서정적이고 향토적인 분위기의 구상화였으나 종군화가로 전쟁의 참상을 목격한 후 그의 그림에는 전쟁의 상처가 작품 전반에 깔리게 된다.
남관 "환상", 1962년 "나는 두 차례의 전쟁, 즉 제2차 세계대전과 6.25 한국동란을 겪었다. 숱한 사체, 숱한 부상자를 보았다. 그들의 비틀어진 얼굴들은 꼭 고성에 무너진 돌담 조각 같았고 오랫동안 흙속에 파묻혀 있던 석기시대의 부서진 유물들이 마침내 대낮의 강렬한 햇볕에 드러난 흠진 자욱같이 보였다."
남관은 부산으로 피난한 1952년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마침 일본에서 열린 제1회 일본국제미술전람회 등을 통해 세계 미술계의 변화를 접한 남관은 고민끝에 프랑스로 가고자 마음먹는다. 이에 남관은 출국 직전 서울 미도파화랑에서 '도불 기념전'을 열었고 작가를 후원하고자 제법 많은 사람들이 그의 그림을 사게 된다.
남관 "패왕의 환상", 1979년 하지만 프랑스로 건너간 남관은 극한의 상황속에 그림을 그리게 된다. 수익금 3000달러를 맡았다가 매달 50달러씩 학비로 송금해 주기로 한 사람이 돈을 삼켰다. 게다가 매달 100달러 지급 후원을 약속했던 아시아 재단이라는 곳도 소식이 끊기며 남관은 대략 2년 동안 굶기를 밥 먹듯 했다.
그런 가운데 1959년, 3년여의 파리생활을 청산한 김환기가 파리를 떠나기 전날 몽파르나스 남관의 화실로 찾아왔다. 자신은 비록 파리를 떠나지만 남관만큼은 끝까지 파리에 남아주기를 원했다.
남관의 전환점은 한국인 최초로 1958년 살롱드메에 초대되면서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미술제로 1951년 피카소는 이 전시를 통해 "한국에서의 학살"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를 시작으로 그림이 팔리기 시작했고 1966년 피카소, 타피에스 등 거장들이 참가한 망통회화비엔날레에서 대상을 받아 일약 스타가 됐다.
남관 "무제", 1983년 1968년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1977년까지 홍익대학교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1985년 평창동에 작업실 겸 살림집을 지었고 1990년 봄이 되자 기관지염으로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여 김환기의 이름을 부르다 숨을 멈추었다. 남관이 80세까지 그린 작품은 대략 3000점에 달한다.
남관이 창안한 대표적인 조형기법으로 데콜라주가 있다. 데콜라주는 콜라주와 반대로 붙인 이물질을 떼어 내는 작업이다. 남관은 이러한 작업을 통해 시간을 한 겹씩 벗겨 내며 원형의 세계로 돌아갔다. 시간이 쌓이는 건축적 서양미술과 달리 시간과 물질의 층을 한 겹씩 벗겨 내려가는 것이 그의 데콜라주였다. 서양적인 기법에 기반하면서 동양의 내면적 철학이 담긴 것이 남관 작품의 매력이었다.
남관 "봄날의 피에로", 1989년 남관은 청색과 자색을 좋아해서 그의 작품에는 푸른 색조가 많다. 매혹적인 색상 분위기로 읽을 수 없는 문자성과 조형 형상 표현으로 신비롭고 찬란한 화면을 구성하였다. 세계적인 미술평론가 가스통 디일로부터 "동서양 문화의 어느 일부도 희생시키지 않으면서 둘을 융합시킬 수 있는 거의 유일무이한 대예술가"라는 찬사를 받았다.
l 남관 작가의 이야기를 마치며... l 남관의 문자추상은 이응노와 같은 표현방식으로 보이지만 작품의 제작과정과 화면의 구성은 전혀 다르다. 만약 옥션과 같은 곳에서 두 작가의 작품을 같이 볼 기회가 된다면 각각의 작품을 비교하며 보는것도 하나의 즐거움이라 생각한다.
문자로 읽히기보다 조형적으로 보이는 남관의 문자추상은 동양의 붓글씨 같으면서도 마야나 잉카 문명에서 볼듯한 그림문자처럼 보인다. 강렬하고 화려한 색채와 데콜라주 기법이 사용되어 동시대의 평면회화들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전달하는 것도 매력이다. 그의 치열했던 예술혼을 기억하고 작품을 마주한다면 훨씬 더 풍성하게 작가의 그림을 해석하고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남관 "회상 또는 마음에 비치는 일그러진 상들", 1981년, KRW 350,000,000 홍콩 크리스티 2014년 11월 참고서적 "살아남은 그림들"
참고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참고기사 "궁핍한 화가 남관, 파리에선 안 먹는 소뼈 고아 먹고 '호강'.", 중앙선데이, 2019. 11. 09728x90반응형'아트 컬렉터를 위한 작가소개 > 대가_작고, 원로작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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